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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가볼만한 곳

숲캉스 코스로 추천하는 충주 청룡사지 소개와 여행정보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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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지에 가면 국보, 보물, 도문화재자료를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국보는 보각국사탑이고, 보물은 보각국사탑비와 사자석등이고, 도문화재자료는 위전비와 석종형부도인데요, 흐르는 세월을 따라 인걸도 가고, 절집도 가고, 그 흔적마저 퇴색되어 유야무야하지만 이런 석물들이나 남아서 그 시절을 증언 겸 위로하고 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고, 글로만 읽는 것도 소중한 관심이지만 직접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겠죠? 요즈음은 참 편리한 세상이라서 길 도우미에 목적지만 입력하면 됩니다. 여러분, 10분이라는 시간을 내서 저를 한번 따라나서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제가 귀한 구경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추적추적 듣는 빗방울이 폐사지를 둘러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날입니다. 안 그래도 적막한 폐사지에 비의 장막을 치고 들어가서 오롯이 저와 폐사지만 남아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급경사 구간에 차를 세워 둔 후 겸허한 마음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오르막 끝까지 걸어 올라갑니다.

 

 

 

길 끝에 꽤 넓은 마당과 함께 근래에 지은 것이 분명한 전각 한 채가 서 있습니다. 의외이기는 하나 이런 신식 전각이 폐사지의 명성을 대변하는 경우도 많으니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갑니다. 마당에 서면 보각국사탑, 보각국사탑비, 사자석등, 위전비, 석종형부도 등이 보일 줄 알았는데 영 오리무중입니다. 혹시 뒷산에 올라앉아 있을까요? 산길도 또렷이 드러나 있어서 따라 올라갑니다. 발길에 반들반들 닳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사람이 낸 길이고, 최근까지 사람이 다녔습니다.

 

 

 

커다란 신식 불상을 지나쳐서 길이 이어집니다. 너무 산속이라 이미 보각국사탑, 보각국사탑비, 사자석등, 위전비, 석종형부도 등은 그른 듯하나 저 위에 전각 한 채가 서 있으니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전각 앞에 섭니다. 삼성각입니다. 애석하게도 드러나는 산길은 여기까지고, 보각국사탑 등은 흔적도 없습니다. 이대로 산이 되거나 발길을 돌려 내려가는 선택 중에 후자를 택한 뒤 하릴없이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가며 108 번뇌를 넘어 1080 번뇌까지 자책을 겸한 의문으로 머릿속을 다그칩니다.

 

‘어디서 잘못됐을까?’

‘청룡사가 아니라 황룡사였을까?’

‘백룡사도 본 것 같은데?’

 

머리통이 첩첩산중인 것 같습니다.

 

 

 

마당에 내려서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길 도우미에 ‘충주 청룡사지’가 아닌 ‘충주 청룡사’를 넣은 것이 잘못입니다. 청룡사와 청룡사지가 가까워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광활한 충주 땅만큼이나 헛걸음질할 뻔했습니다. 청룡사는 청룡사지를 잇는다는 뜻으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시동을 걸고 청룡사지를 찾아 나섭니다.

 

 

5분도 안 되어 청룡사지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부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충주 청룡사’와 ‘충주 청룡사지’를 헷갈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에서 내려서 먼저 안내도를 살핍니다.

 

 

보각국사탑, 보각국사탑비, 사자석등, 위전비, 석종형부도 등 반가운 이름이 하나도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허현 묘와 허적 묘가 표시되어 있는데 거리가 조금 되는 데다 날씨마저 궂어서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은 경건하되 발걸음이 가볍게 탐방로에 들어섭니다. 잠시 후 위전비가 반가이 맞아 줍니다. 공식 명칭은 ‘충주 청룡사 위전비’이며, 충청북도 도문화재자료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위전은 관아, 학교, 사원 따위의 유지를 위해 마련한 토지를 말합니다. 위전비라는 이름처럼 이곳에는 청룡사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1692년에 신도들이 시주한 전답 내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당연히 시주한 이의 이름과 수량이며, 비석에 두세 차례에 걸쳐 이름과 수량이 추가된 것으로 보아 청룡사가 수차례 고쳐지거나 중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비신 위에 일부 파손된 가첨석이 올라가 있습니다.

 

참고로 청룡사는 이름난 절입니다. 여기서 간행한 고려 시대 불서 가운데 오늘날 전하는 것만 해도 1378년에 판각한 선림보훈과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 1379년에 판각한 호법론, 1381년에 판각한 선종영가집 등이 있을 만큼 교리 연구에 정진한 곳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명성이 이어지고 불서가 간행되었으며, 특히 1449년에 석보상절 초간본이 나와서 전국 5대 사찰에 보관될 때 그중에 한 곳이었을 만큼 명성을 자자한 곳입니다. 그런 청룡사가 폐사된 데는 참으로 어이없는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조선 말기에 민대룡이라는 자가 소실의 묘를 근처에 쓴 후 주변에 절이 있으면 안 좋다는 말에 불을 놓았다다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는 지극히 복잡하면서도 지극히 단순하게, 그리고 지극히 공적인 듯하면서도 지극히 사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위전비를 지나서 조금 올라가자 석종형부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확한 명칭은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이며, 위전비와 마찬가지로 충청북도 도문화재자료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부도와 승탑은 같은 말입니다. 석종형부도는 입적하신 스님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형 탑을 말하고, 탑신에 새겨진 글자는 마모가 심해 '寂雲堂舍利塔(적운당사리탑)'으로 추정할 뿐이며, 탑신 윗부분에 원형 받침대 모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 다른 장식이 존재한 것 같습니다. 석종형부도 앞에는 무엇인가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린 부도 한 기가 수습되어 있습니다.

 

 
 

 

석종형부도를 지나서 조금 더 올라가자 사자석등, 보각국사탑, 보각국사탑비가 차례로 서 있습니다. 모두 보각국사를 기리는 소중한 유물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각각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이며 현재 보물, 국보, 보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자석등은 바로 뒤 보각국사탑에 모신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두툼한 지붕돌은 고려 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고, 정사각형 석등은 조선 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고, 밑에 사자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음으로 보각국사탑은 보각국사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승탑입니다. 사리공에 원래 보각국사의 사리와 옥촛대와 금잔과 금송아지 등이 모셔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보각국사는 1320년에 태어나서 1392년에 입적한 분으로 청룡사와 관련된 여러 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입니다. 고려 말기에 여러 왕의 국사를 지내기는 했으나 응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적을 버리고 도망칠 때도 많았으니 권력을 초탈한 참된 구도자 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입적한 해가 조선이 개국한 해이고, 조선 태조가 직접 보각국사탑 건립을 명하였는 바 외양은 고려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각국사탑비는 보각국사가 입적하고 2년 뒤인 1394년에 조선 태조의 명을 받아 권근이 비문을 짓고, 천택이 글자를 쓰고, 희달이 총괄해서 세운 비입니다. 내용은 당연히 보각국사를 추앙하고 있습니다. 비신 위쪽 양 모서리를 탁탁 친 것이 특징인데, 이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한 귀접이 양식입니다.

 

 

더 위로는 길이 없습니다. 오솔길인 듯, 오솔길이 아닌, 오솔길 같은 길이 보이기는 하지만 도전해 보기에는 젖은 세상과 내리는 비가 너무 성가십니다. 그래서 주차장부터 지금까지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면서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과 ‘충주 청룡사 위전비’를 다시금 살피는 것으로 청룡사지 탐방을 마무리합니다. 

 

 

 

값진 문화재도 접하고, 살아 있는 자연도 접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청룡사지 일대가 얼마나 살아 있는 자연이냐 하면, 지금까지 저는 이끼가 이렇게 융단처럼 깔린 탐방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숲 전체가 거대한 폐인 것 같았고, 발바닥에서 전해오는 폭신함이 감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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